생각해보면 같이 살 사람을 먼저 구하고 집을 구하는 게 순서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수진이는 꼭 뭐에 씌인 사람처럼 조급하게 굴었다. 하루라도 빨리 용인 집을 탈출해 뜻이 맞는 다른 여성들과 머리를 맞대고 의기투합하며 잘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 솔직히 말하면 비혼 여성 공동체를 꾸리는 일에 대해 그전까진 그리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막상 현실로 닥치자 수진이는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다.

가락역 5분 거리에 위치한 보증금 1억에 월세 180, 방 4개, 화장실 2개짜리 아파트를 발견했을 때 수진이는 어떤 운명적인 교감을 느꼈다. 이 집을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수진이는 계약을 서둘렀고 부랴부랴 도장을 찍고 나니 이번에 빈집에 살림살이를 채워 넣는 게 또 일이었다.

‘자기만의 방?’, ‘자기들만의 방?’, ‘우리의 방?’

온갖 이름을 궁리하던 수진이는 비혼해서 행복한 웃음 많은 여자들이란 의미로 공동체 이름을 ‘비행 소녀’로 지었고 비행 소녀용 SNS 계정을 파 멤버들을 모집함과 동시에 이케아와 오늘의 집을 들락거리며 인생 최대의 쇼핑을 시작했다.

- 『옆집의 비혼주의자들』 중에서

  함께 산다는 건 왜 이토록 힘들까?

송파구 가락동 현대아파트는 비혼주의자 수진의 원대한 포부를 실현시켜줄 유토피아였습니다.  수진의 머릿속에서 비혼주의자들의 동거란 안락하고 쾌적하며 웃음이 끊이지 않고 시기와 반목, 갈등과 협잡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였습니다.

수진은 부동산 카페에서 입주 희망자들을 모아 속전속결로 ‘비혼(非婚)해서 행(幸)복한 웃음(笑) 많은 여(女)자들’ 비행 소녀(非幸笑女)를 결성합니다.

수진의 앞날은 예상처럼 유토피아였을까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유구한 속담처럼, 생판 남 다섯이 모여 사는 건 생각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이 혼란이 누군가 뚜렷한 악의를 갖고 이 사이를 망가뜨리려고 작정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서로가 태생적으로 너무 다른 사람이라는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더 조율해나가기가 쉽지 않죠.

수진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절절히 느끼며 ‘비혼주의자’라는 타이틀 자체에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저 사람들을 정말 비혼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진정한 비혼주의자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의구심은 나아가 ‘그럼 결혼을 한 사람들은 나보다 행복한가?’ 하는 물음에 도달하죠.

평생을 함께 살아온 피를 나눈 가족 간에도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는데, 하물며 난생처음 만난 사람들과의 동거는 얼마나 예상치 못한 경악스러운 기행들의 연속일까요? 삶은 수진의 상상처럼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건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너무 달라서일 뿐이라는 걸 잘 알지만,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는 꼬인 매듭의 연속입니다. 과연 수진의 바람처럼 비행 소녀 1기의 역사적인 첫 비행은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을까요?

  비혼과 기혼, 그들의 신 포도

소설 속에는 비행 소녀 다섯 명 외에 유일한 기혼 여성인 소희도 등장합니다. 뜻이 맞는 타인과의 동거라는 점에서, 남편과 살고 있는 소희의 삶도 비행은 아니지만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죠. 그녀도 비행 소녀들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여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소희는 민규와의 불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에서 문득 수진을 떠올립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기대지 않고 아이를 길러내기엔 교사만큼 좋은 직업이 없는 것 같았다(295쪽)”. 수진이 왜 결혼하지 않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비혼주의자들을 모아 공동체를 결성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어디에도 메이지 않은 부러운 삶이라는 생각은 들어요. 하지만 하늘이 두 쪽 나도 이미 자신은 민규와 혼인한 몸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희는 애써 생각하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민규를 고르거나 민규 비슷한 남자를 고르겠지만(같은 쪽).”

우리는 어떤 갈림길을 마주했을 때 더 나은 결과가 기대되는 방향을 선택합니다. 그건 소희와 다섯 비행 소녀들도 마찬가지였겠죠. 그 반대의 선택보다는 더 행복하리란 희망을 품었을 거예요. 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건너편의 길을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요? 그건 자신이 묵묵히 걷고 있는 지금 이 길이 생각했던 것만큼 쾌적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서른이 훌쩍 넘은 그들은, 자신의 선택에 자신이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 길은 훨씬 더 별 볼 일 없었을 거야’ 하는 신 포도 같은 위로를 곱씹게 됩니다. 

좌절과 극복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은 있을지언정 완벽한 선택지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고로 넉넉레터 독자분들에게만 살짝 알려드리자면, 원래 소설의 가제는 ' 저 포도는 시다' 였다는 사실!

  그 틈에서도 꽃 피우는 ‘꿈’

유토피아를 바랐지만 실상은 녹록지 않던 수진의 이야기에도 작은 희망의 씨앗은 있습니다. 자신을 다른 무엇보다 비혼주의자라고 소개하기를 원하는 수진은 브런치에 ‘블루스타킹’이란 필명으로 비혼에 관한 글을 연재해요. 그 끝에는 성공적인 작가로서의 삶을 이룩하고 예능프로그램 ‘유퀴즈’에 나가 유재석과 하하호호 떠들며 성공담을 늘어놓고 말겠다는 조금 속물적인 면모도 없지 않지만요. 어쨌든 수진은 신 포도가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작가가 되겠다는 굳센 동아줄은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울적한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신 어느 밤, 알딸딸한 정신 속에서도 수진은 브런치에 꾸역꾸역 글을 연재하고 잠이 들었으니까요. “와인 두 병, 맥주 네 캔을 연달아 마신 수진이는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276쪽)”

사람은 누구나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자기만의 기둥을 내면에 세우며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그것이 친구 혹은 가족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애인이나 반려동물 혹은 여행의 기억, 취미, 신념 같은 것일 수도 있죠. 수진에게 그 기둥이란 바로 ‘작가’라는 꿈이었겠죠? 고난과 역경을 건너 수진이 작가라는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해요!

오늘 함께하면 좋은 두드림으로 소개해드리고 싶은 작품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날씬한 적 없는 모태비만 메이트 세 여자의 유쾌한 우정과 사랑을 담은 김인숙 작가님의 소설 『먹고 마시고 자라』입니다.

'헤비급 섹스 앤 더 시티'라는 애칭이 달린 『먹고 마시고 자라』는 뚱뚱한 그녀들이 사랑하는 남자들과 먹고, 마시고, 자면서 느꼈던 그 달콤, 쌉쌀, 짜고, 매웠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 소설인데요, 비혼주의자와 결이 너무 다르지 않냐고요? 

『옆집의 비혼주의자들』에 나오는 주인공의 사랑과 연애에 대한 관점은 다소 다를지 몰라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사회적 시선과 억압에 반대하는 유쾌하고 거침없는 여성들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먹고 마시고 자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작품은 무수히 쏟아지는 다이어트 광고와 성형수술의 유혹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왜 여자는 평생 외모와 체중에 집착해야 하는지, 날씬하지 않은 여성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해 묻고 있죠. 이런 우매한 질문에 소설은 "조금 뚱뚱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내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다면 이미 당신은 충분히 아름답다" 고 "그냥 즐겁게 먹고, 마시고, 자라!" 고 유쾌하게 외칩니다. 

물론 이런 외침과 깨달음이 있기까지 주인공들에겐 각기 말 못 할 고난과 역경이 있지만, 세 여자의 파란만장한 연애기를 통해 현재의 나를 사랑하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옆집의 비혼주의자들』의 수진과 비행 소녀들이 파란만장한 비혼 여성 공동체의 삶을 통해 조금 더 성장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