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기다리는 더 거대한 이야기들

그만큼 아버지란 사람은 우리 가족에게 성가신 존재였다.

현관에 들어서자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불길함을 감지했다. 오늘따라 실내는 음침하고 고약한 냄새로 가득했고, 불쾌한 기운이 와락 달려들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나는 나무토막처럼 웅크린 채 그대로 굳어버린 아버지란 사람에게 다가가 임종을 확인했다.

그의 죽음이 선명해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우리는 흐느끼기 시작했고, 나 역시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지만 별안간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은 생각에 ‘눈물이 안 나오네’ 하며 정색했다. 가족들 또한 공감한다는 건지 고개를 끄덕였고 동생도 ‘우는 건 좀 오바지’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아빠, 이제 이 방 내가 써도 돼?”

그 와중에 딸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고, 딸의 목소리 뒤로 사뭇 평온하다 못해 화색이 밝아진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머쓱했는지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이내 돌아섰다. 우린 서로에게 슬픔보단 도리어 홀가분해진 감정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시선을 피했다.

장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장례랄 것도 없이 돈이 들어가는 것은 최대한 생략하고 간소화했다. 어차피 찾아올 조문객도 없고 하니 구태여 돈을 낭비할 필요가 있나 싶어 유골은 뒷산 적당한 곳에 대강 뿌렸다. 그리고 사망신고까지 완전히 마무리하기 위해 다 같이 주민센터를 찾았는데, 센터 직원이 들려준 뜻밖의 말에 우린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망자께서 부동산이 있으시네요.”

- 「숲을 벗어나려면 다른 길로 가라」,『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중에서

  내가 벗어나고 싶은 게 막막한 현재일까 보잘것없던 과거일까

주인공에게는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무능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경제활동은커녕 불편한 몸으로 가족에게 짐만 되고 있다고 생각하죠. 아내와 아이 그리고 남동생까지 함께 사는 빠듯한 집안에 아버지는 분명히 사라져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정말로 세상을 떠나고 해방감을 만끽하던 순간, 뜻밖의 사실을 알게 돼요.

"망자께서 부동산이 있으시네요."

아버지의 유산은 생전 구경도 못 해본 호화로운 저택이었습니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할 즈음, 뒷마당에서 오래 방치된 듯 보이는 창고를 발견하고 상황은 완전히 뒤집힙니다.

현재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누구나 불만 한두 가지쯤은 품고 살아갑니다. 이것만 아니면 내 인생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죠. 「숲을 벗어나려면 다른 길로 가라」는,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현실을 일깨워줍니다. 어느 상황에 있든 어찌할 수 없는 불만은 생길 거라고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실은 지금 현실과 타협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줍니다. 어차피 매 순간 불만을 피할 수 없다면, 그냥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더 나을 수 있으니까요.

  당신 옆에 있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지만, 너무 사랑하는걸!

허름한 꽃집을 운영하는 40세 노총각 응수 앞에 곱고 아름다운 선애가 나타납니다. 열렬한 구애 끝에 그녀의 맘을 얻어 결혼까지 골인하려는 찰나, 낯선 사내가 응수의 앞에 홀연히 나타나 경고하죠. ‘저 여자의 전남편들이 거액의 사망보험을 들고 죽어버렸다는 걸 아십니까? 무려 세 명이나요.’ 선애의 곁에 있으면 아마 높을 확률로 죽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눈앞에 있는 그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인 것을 어찌할까요.

「죽어도 좋아」 독자들은 쉽사리 응수를 응원하기가 힘듭니다. 선애의 사랑은 돈을 노린 독사의 탈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선애가 의심스럽지만 응수의 사랑이 너무 애틋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게 응원과 반대가 치열하게 교차하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끝자락에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제야 장르가 명확해지죠. 그것은 정말 스릴러였을까요, 아니면 결국 로맨스였을까요?

  지구인의 몸을 갖고 싶은 꼴뚜기별 외계인

주인공은 지구인의 몸을 빌려 외계인들에게 국내 관광을 시켜주는 여행 가이드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그날도 스무 마리의 외계인들에게 국내 관광을 시켜주고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함께 관광했던 외계인 중 한 마리가 스멀스멀 기어와 속삭이죠. “나 몸 좀 바꿔줘. 저녁에 홍대 클럽 가야 하는데 50대 아저씨 몸으로는 입장 금지당할 게 뻔하다고!” 주인공은 이 막무가내 부탁에 어떻게 응수할까요?

「우리 별엔 왜 왔니?」는 단순히 코믹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한참을 키들거리며 웃다가 어느 순간에는 뒷골이 뻣뻣해진 채로 주변을 휘둘러보게 되죠. 혹시 내 주위에도…… 싶은 진지한 의심을 품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해서는 생각지도 못한 반전을 맞닥뜨려요. 앞선 이야기들이 너무 강렬해서 차마 반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마지막 함정입니다. 정세진 작가의 이야기들은 이처럼 현실을 비집고 들어와 여운을 남기고, 오래도록 휘발되지 않는 강렬한 힘이 있습니다.

장편소설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과 인물들 간의 관계, 복선의 활용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해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합니다. 그에 반해 단편소설은 신선한 소재와 휘몰아치는 전개로 압축된 재미를 보여주죠. 정세진 작가의 단편소설은 이러한 단편소설의 역할을 흐트러짐 없이 정통으로 해냅니다.

정세진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는 출간 직후부터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차원이 다른 몰입감이다’ ‘첫 작품을 읽고 소름이 돋았다’ ‘올해 읽은 소설 중 가장 기발하다’는 후기들은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기도 했답니다😋

일단 맛보면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맛집의 문구처럼, 정세진 작가의 작품은 한 번도 안 읽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작품만 읽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모든 작품집을 찾아 읽게 될 거예요!

정세진 작가가 써 내려가는 세계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그 어딘가에서 우리에게 손을 흔듭니다. 가까워질 것 같으면서도 막상 다가가면 전혀 새로운 비현실의 세계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다음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게 하는 힘이 되죠. 첫 번째 소설집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천재 이야기꾼의 탄생을 알리는’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소설집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는 ‘그 천재 작가의 세계를 맘 편히 유영하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어요. 일곱 가지 에피소드 중 표제작인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속에 나오는 일부 설정은 작가님의 실화에 기반한 것이라고 해요! 실제로 작가님이 거주하시던 건물에서 한 아이돌팀이 연습생 생활을 했었는데, 그때 목격한 어떤 장면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이야기의 씨앗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 세계가 열광하는 스타가 되어 종종 새삼스럽다고 하시네요😀

누군지 궁금하시죠? 지금 바로 리디에서 확인해볼 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