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학교. 일 등이 되어 졸업하면 어떤 과정으로 주인이 된다는 걸까. 만약 일 등이 되지 못하고 탈락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곳에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나간다면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만약 교장의 말대로 학교에서 고난을 이겨내고 졸업을 하면 정말 과거의 나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가. 이 괴상한 학교는 무엇으로 그것을 보장할 것인가.
한서정은 뒤척거렸다. 어둠이 소리를 집어삼킨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 전체가 죽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 고요가 먼 과거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자꾸만 기억이 떠올랐다. 어째서 사람은 고요하고 어두운 곳에 혼자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과거를 돌아보게 되는 걸까. 찰나의 순간순간이 장면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 피. 붉고 선연하고 소름 끼치도록 맑은 피.
- 『하인학교』 중에서
'하인학교'를 소개합니다.
한 여자가 어딘가로 향합니다. 공기가 검게 물들어가는 시간, 가로등이 없어 어둠이 세상을 차단하는 듯 캄캄해진 길을 걷습니다. 이윽고 최고급 리조트의 로비에 들어서고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또다시 불 꺼진 골프장 한가운데를 지납니다. 리조트 골프장을 외부와 구분 짓는 측백나무 숲 한편에 있는 좁디좁은 수풀 사이를 파고드니 어딘가 음산해 보이는 문이 보입니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문. 여자는 그 문을 열고 미지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여자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요? 바로 ‘세상의 바깥’이라 불리는 비밀스러운 공간, 하인학교입니다.
빛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누구나 삶이 휘청일 때가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평화로운 일상을 무너뜨리곤 하죠. 제게도 분명 그런 일이 있었어요. 머릿속에 여러 일이 떠오르지만 선뜻 용기 내어 말하기가 두려운 일이요.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아리지만 다행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딛고 선 땅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하인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거든요. 집안이 무너져 도피하다 사람을 죽이고, 아비에게 폭행을 당하며 자라 아비를 죽이고, 상처 난 곳을 또 난도질당해 회복 불능 상태에 이르고……. 이들에게 남은 건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뿐이었어요. 도저히 다시 딛고 일어설 방법이 없었죠. 그렇게, 삶의 빛을 모조리 빼앗긴 이들이 하인학교에 입학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 품고서요.
삶의 주인이 되는 유일한 방법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걸까요? ‘하인으로 들어가 주인이 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모든 과거를 지우고 주인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강해져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누구보다 강해지는 방법은 단연 ‘부’를 거머쥐는 것이겠죠. 막대한 부가 있다면 하인처럼 살아온 과거쯤은 쉽게 세탁할 수 있을 거고요. 그렇게 하인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재벌가에 들어가 주인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습니다. 재벌에게 접근해 결혼한 다음 천천히 잠식하듯 집안 전체를 집어삼키기 위해서요. 그게 말처럼 쉽겠냐고요? 그렇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래서 하인학교는 말도 안 되는 커리큘럼으로 교육합니다. 역사 시간엔 재벌인 타깃의 심리부터 비밀까지 전방위로 분석하고 전공 수업 시간엔 타깃이 운영하는 기업의 모든 정보를 섭렵합니다. 잠도, 밥도, 웃음도 사치에 불과하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상해를 입혀도 용납되고, 차마 교육이라 부를 수 없는 가학적인 방식까지 동원해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부러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바스러져도 또 일어나는 과정을 견뎌낸 단 한 명의 학생만이 졸업해 재벌가에 들어가게 됩니다.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더라도
이쯤 되니 궁금해졌어요. 그렇게 재벌이 된다 한들, 과연 행복할까요? 그 과정에 또 얼마나 많은 잔혹한 일들이 벌어질까요? 저라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아요. 버틸 때까지 버텨본다 해도, 제 의지와 상관없이 탈락하지 않을까 겁이 나거든요. 어쩌면 그런 두려움이 하인학교 입학생들을 더 잔혹하게 생존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돌아가면 나락뿐이니 문 너머에 무엇이 있든 죽는 힘을 다해 나아가야만 하는 거죠.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그 어떤 미래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 모든 걸 전복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인학교에 입학하시겠어요?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가장 높고 밝은 곳으로
지난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 중 하나!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보셨나요? 어느 날 700억이라는 거액을 손에 쥐게 된 인주가 그 돈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예요. 가난하게 살아온 세 자매의 처절한 서사를 세련되고 치밀하게 풀어낸 덕에 ‘역대급 드라마’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어요. 그런 평가를 증명하듯 59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작품상, 연출상, 극본상, 예술상 네 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고 해요.
『하인학교』와 <작은 아씨들>은 누구보다 낮고 어두운 곳에 있던 이들이, 누구보다 높고 밝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닮았어요. 『하인학교』는 <작은 아씨들>만큼
이나 강렬한 이야기이고, 『하인학교』의 주인공 한서정은 <작은 아씨들>의 오인주보다도 지독한 삶을 살아왔거든요.
『하인학교』는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김이은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입니다. ‘문학계의 큰 별’ 故 김윤식 문학평론가님은 김이은 작가님을 “상황을 장악하는 작가”라고 평가하셨어요. 『하인학교』는 그 평가를 증명하듯, 부와 계급 그리고 욕망에 대한 통찰이 날카롭게 새겨진 소설이자 이야기의 거대한 힘이 느껴지는 소설이에요.
『하인학교』는 고즈넉이엔티가 새로 선보이는 무규정 소설 브랜드 오르트북스(Oort Books)에서 출간됐습니다.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울타리를 허무는 소설들을 선보일 예정이니, 많이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