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일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

“그러게 왜 도망을 치실까? 그리고 보험 머시기 하는 양반이 우리 선애 씨는 왜 훔쳐봤어?”

남자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나직하게 말했다.

“한선애 씨는 특별조사팀 조사대상이니까요. 그것도 생명보험 사기가 의심되는 블랙 가입자!”

예상치 못한 말에 응수는 귀를 의심했고,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재작년에 한선애 씨 남편이 사망하면서 사망보험금을 무려 7억이나 수령했어요.”

거액의 사망보험금 얘기까지 나오자 응수와 철웅은 너무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그거야…… 가입을 했으니까 받은 걸 테고. 보험금을 많이 받았다고 의심받을 일은 아니지.”

응수가 제 일처럼 반박하고 나서자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전남편이 모두 사망했는데도? 그것도 자그마치 셋이나!”

-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죽어도 좋아」 중에서

  단번에 시선을 붙드는 소재들

긴 소설은 주어진 소재에 살을 붙이고, 중심 이야기에서 가지를 쳐 또 인물을 더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엮어낼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만국 공통의 진부한 소재로도 수십 수백만 가지의 다양한 영화, 드라마, 소설을 탄생시킬 수 있는 이유죠. 그에 반해 짧은 소설은 인물 개개인에게 서사를 부여해 독자들의 깊은 공감을 유도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짧은 소설은 제한된 장비 중 독자를 사로잡는 방법으로 ‘강렬한 소재’를 선택합니다.

정세진 작가의 짧은 이야기들은 듣자마자 궁금증이 샘솟는 신선한 소재들로 가득합니다. ‘생명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에게 접근한 여자와 결혼을 결심한 남자’, ‘난생처음 인간의 몸을 갖게 된 꼴뚜기 별 외계인의 일생일대의 소원’, ‘무(無)의 존재로 살다 어느 날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존재가 된 청년’. 이 이야기들은 소재만으로도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도무지 머릿속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뒷이야기가 궁금해 페이지를 멈출 수가 없어요.

「안티 바이러스」는 평생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채 무(無)의 존재로 살아온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빚을 떠넘기지 않기 위해 할머니는 청년을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은 채 산속에 숨겨 길렀습니다. 청년은 제 나이를 스무 살 남짓 됐으리라 추측만 할 뿐이죠. 어느 날 청년의 유일한 피붙이였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낯선 사내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얘기하죠. ‘선생님은 저희가 찾아 헤매던 분입니다. 세상을 구할 유일한 존재예요.’

청년의 비밀이 궁금해 우리는 페이지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이 청년이 대체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걸까요?

  달음박질치는 빠른 전개

유튜브 ‘드라마 N분 요약’을 즐겨 보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군더더기는 다 제거하고 중요한 부분들만 편집해놓은 영상들이죠. 재미있다고 입소문 난 드라마를 보고는 싶은데 10화가 넘는 분량을 생각하면 선뜻 1화를 시작하기가 망설여집니다. 드라마를 본다는 건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를 할애하는 것인데, 모든 회차를 챙겨 본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죠. 그래서 ‘재생’ 버튼을 누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유튜브 ‘N분 요약’ 콘텐츠가 요즘 인기가 많습니다.

짧은 소설은 이처럼 요약본을 닮은 이야기입니다. 잘 다듬어지고 편집되어 중요한 이야기들만 남겨두죠. 오직 한 줄기만을 따라 거침없이 진행되는 이야기는 독자들이 한눈팔 틈을 주지 않고 멱살을 붙들 듯 끌고 갑니다.

「조작된 기억」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죽인 파렴치한에게 복수를 한 주인공의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은 난도질당한 범인의 시신을 내려다보면서 통쾌함이나 기쁨보다는 기억의 일부가 지워진 것 같은 혼란스러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점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빠르게 전개되죠. 1시간 전, 12시간 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새롭게 밝혀지는 진실들에 독자들은 더욱 사건에 집중하게 되고. 빈틈없이 맞춰지는 퍼즐처럼 이야기는 점차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합니다. 결국 범인이 주인공의 발아래 누워 있어야 했던 진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 독자들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고 말 거예요.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고작 열다섯 장의 짧은 분량에서 모두 펼쳐집니다. 납작한 종이 몇 장에서 펼쳐지는 고요한 광풍 같은 이야기들은 오직 정세진 세계에서만 만날 수 있어요!

  오래도록 곱씹게 되는 진득한 결말

짧은 소설은 독자들을 정신없이 끌고 가다가 상상도 못 한 결말 앞에 탁 던져둡니다. 강렬한 소재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과감한 전개에 방심한 독자들에게 주는 최후의 충격 같은 거죠.

정세진 작가의 이야기는 이처럼 우리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는 한 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 이야기 중 망한 아이돌의 기막힌 프로젝트를 다룬 이야기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에서 잘 확인할 수 있어요. 주인공은 힘든 시간을 거쳐 어렵사리 아이돌로 데뷔하지만, 금방 망해버립니다. '망한 아이돌'이란 꼬리표를 달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주인공에게 누군가 명함 한 장을 건네요. ‘너바나 엔터테인먼트 너후나 대표.’ 그곳은 방쉬리, 이엉자 등 유명인들을 모방한 아티스트들을 길러내는 회사였어요. 그리고 대표가 주인공에게 건넨 제안은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바로 월드스타 ‘BTX’를 모방한 그룹 ‘VTX’가 되어 월드투어를 도는 것! 앞으로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주인공은 이 어이가 없는 제안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내가 이 일에 최선을 다해도 될까?’

유명인을 모방한 아티스트가 되어 무대에 서게 된 주인공의 비현실적이고 어딘가 웃픈 이야기의 끝에는 우리의 마음속을 따듯하게 데워주는 온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처지를 보며 깔깔 웃다가 마지막에 다 와서는 별안간 깊은 위로를 받게 될 거예요.

단편소설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단편 영상에서 얻는 즐거움은 같은 맥락을 갖고 있어요. 기발한 소재와 속 시원한 전개에 화려한 영상까지 갖췄다면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겠죠.

넷플릭스의 인기 앤솔로지 시리즈, 『러브 데스 + 로봇』 시즌3의 한 에피소드인 「메이슨의 쥐」는 밭을 망가뜨리는 쥐들과의 전쟁을 선포한 농장 주인 이야기입니다. 쥐의 시선에서 전개된다는 신선한 발상과 빠르고 자극적인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라 생각했는데, 마지막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강렬한 결말이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맞닥뜨리는 날카로운 메시지가 충격이 훨씬 강력하더라고요.

정세진 작가의 짧은 이야기들에도 언제나 이런 유쾌한 충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른 바다의 잔잔한 물결 같던 이야기는 뒤에 무언가 곱씹게 되는 맛을 남기죠. 마냥 킬킬대며 웃다가 뒷목이 서늘해진다거나 불같이 분노하다가 결국 뭉클해지고 마는 경험을 선사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가 주는 짧은 이야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길 바라요.